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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며

러시아의 과학자 로마노소프 (Михаил В. Ломоносов)

by Дона 2009. 10. 31.

로마노소프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Михаил В. Ломоносов) 는 러시아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자로서 물리학, 화학, 지리학 등의 과학분야 뿐만 아니라 언어학, 역사학 및 교육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시인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장인으로 다방면에 뛰어난 인재였으며, 러시아에서는 뉴턴이나 아인스타인 보다도 과학자로서 더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북극해에 가까운 아르항겔스크 부근의 작은 어촌에서 1711년 11월 8일, 농사와 고기잡이를 하며 살던 극빈가정에서 태어난 로마노소프는 어릴 때에는 아버지와 북극해로 고기잡이를 다니면서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드물게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어린 나이에 책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노소프가 졸라서 신부님이 종교서적들을 가지고 읽는 법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1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서야 산술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배움에 목말라 있던 로마노소프에게는 큰 전기였습니다. 로마노소프의 아버지는 작은 선박으로 주변의 마을들로 물자를 수송하면서 점점 생활을 피워 갔고, 로마노소프가 십대가 되었을 때 쯤에는 그 지방에서 가장 큰 선박을 소유했을 정도로 사업에 성공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여러 번 결혼을 했는데, 로마노소프는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는데다가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나이 19살이 되었을 때, 가업을 이어받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와 절교하고 여러 달을 걸어서 모스크바로 갔습니다.


당시에는 귀족계급의 학생들 만 우수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변방에서 온 농부의 아들이 유명한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지방에서는 부자였지만 학급에서 그는 가장 가난한 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20살 나이에 12살 짜리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놀림도 많이 받고 멸시도 받으며 지냈습니다. 또한, 생활비가 없어 흑빵과 끄바스 만으로 연명하며 지내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12학년의 공부를 5년 만에 1등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졸업을 하면서 12명이 당시의 수도였던 뻬쩨르부르크에 있는 뻬쩨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에 가서 공부를 더 할 수 있도록 선발되었는데, 그는 과학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공부를 마쳤습니다.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갈 자격이 되는 3명 가운데 1명으로 선발돼 2년 동안 독일로 공부를 하러 갔으며, 독일에서 로마노소프는 독일어를 단기간에 습득한 후 철학과 화학을 전공했으며 독일문학에도 심취했습니다. 독일에서의 생활 중에 하숙을 하던 집의 딸과 사랑을 하게 된 로마노소프는 그녀와 1740년 6월 결혼을 했지만 러시아로 부터 받는 장학금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어 로마노소프는 뻬쪠르부르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물리와 화학분야를 이끌어 가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라틴어로 강의가 진행되어 왔던 것을 1742년에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어로 강의를 시작했고, 러시아어 문법책 교과서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오목렌즈에서 반사되고 집중된 빛이 측면의 접안렌즈로 향하도록 되어있는 구조의 천체망원경을 최초로 만들었고, 자신의 집 근처에 있던 작은 관측소에서 금성의 궤도를 관측한 것을 기초로 금성에 대기가 있다는 가설을 발표했으며, 남극 얼음 밑에 대륙이 있다는 주장을 했고, 수은의 동결을 최초로 실험했으며, 수천 가지 광물질의 목록을 만들었으며, 열을 운동의 한 형태라고 주장했고, 빛의 파동이론을 제안했으며, 실험실에서의 실험을 기초로 보일의 연소이론의 허점을 발견하여 질량보존의 법칙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자연에 있어서의 모든 변화는, 한 물체에서 빠져나간 양은 다른 물체에 더해진 양이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 물질이 이만큼 감소했으면 어디 다른 곳에서 그만큼 증가한 것이다. 우주에 있어서 자연의 법칙은 운동의 법칙을 포함하므로 한 물체가 자신의 힘으로 다른 물체를 움직인다는 것은 힘을 잃으면서 그 힘을 다른 물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1748년 7월 5일 그가 쓴 편지에 언급되어 있는 이 문구는 1760년에 발행된 그의 논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원리를 공식화하여 기록해 놓지는 않았습니다. 1762년에 로마노소프가 발명한 망원경은 1827년 까지는 출판되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개선된 형태의 망원경은 로마노소프 보다 수년 후에 만든 윌리엄허셀의 이름을 따 허셀망원경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룬 업적의 대부분이 그의 사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러시아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고대의 스테인드글라스의 복원에 흥미를 가져 자신의 공장을 세워 스테인드글라스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는데, ‘피터대제’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는 에르미따쉬에 지금도 남아있으며 유명한 ‘폴타바의 전투’는 뻬쩨르부르크의 과학아카데미에 남아있습니다.

그는 또한, 시를 쓰면서 단어 속의 모음의 종류와 모음의 위치에 따라 정서와 상황을 표현하는데 있어 골라 써야 된다는 운율의 일치를 시행했으며, 러시아의 역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의 많은 업적들 중에 하나의 큰 업적은 1755년에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설립하는데 참여한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대부분 귀족들만 공부할 수 있었고, 뻬쩨르부르크에 아카데미가 있었지만 대학전문교육을 받으려면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실정이었으므로, 그는 모든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외국의 교수들이 러시아학생을 가르치는 현실을 극복하고 러시아 인재를 길러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실천했습니다. 종교를 제외한 사회과학 중심으로 교과를 편성했으며 피터대제가 얘기한 대로 ‘사람의 능력을 봐야지 신분을 봐서는 안된다’는 신념으로 재능있는 학생을 선발하여 교육함으로써 러시아의 미래를 러시아사람들이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분차별 없이 학생들을 받아들여 평등하게 교육함으로써 귀족계급과 종교세력의 반발을 샀으며 따라서 적들이 많았습니다.


변방의 가난한 출생이 모스크바에서 성공하는 일은 그 당시에 아주 희귀하고 드문 일이었고, 귀족학생과 가난한 학생의 차별은 아주 컸음에도 수도인 뻬쪠르부르크에 있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 것도 또한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실제로 해명되기에는 불충분한 면들이 있고, 또한 로마노소프의 출생시기 전 피터 대제가 그 부근지역에서 선박건조공사에 목수처럼 일하면서 머물렀었으므로 피터대제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게 가능했다 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2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과 예술가들을 배출한, 그리고 러시아에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 가장 높이가 높은 교육기관인 모스크바 국립대학은 1940년 그를 기리기 위하여 “Москов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имени М.В.Ломоносова’’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달의 분화구와 화성의 분화구에도 그리고 북극해의 깊은 해저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로마노소프는 1765년에 사망, 당시에는 아주 높은 귀족계급과 유명인들만 묻힐 수 있는 묘지였던, 뻬쩨르부르크에 있는 알렉산드라 - 니예프스까야 라브라 에 잠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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