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혁명, 붉은 10월, 소비에트혁명, 또는 볼셰비키혁명이라고 알려진 이 혁명은 페트로그라드 (지금의 뻬쩨르부르크) 에서 1917년 10월 무장반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혁명은 볼셰비키들이 주도했으며, 10월 25일에는 당시 러시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에 임시정부가 있던 겨울궁전을 점령했습니다. 시초에는 이 사건이 반란으로 언급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10월 혁명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또다른 표현으로는 이 사건이 11월 혁명으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그레고리력에 따르면 10월 25일이 11월 7일이기 때문입니다.
혁명 10주기 때 소비에트연방은 10월 혁명에 대한 공식적인 호칭을 ‘위대한 10월 사회주의 혁명’ 으로 결정지었습니다.
'사회주의여 영원하라!' 라는 구호 입니다.
19세기 말은 전 유럽에 경제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였습니다. 자본주의는 역동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자본주의를 먼저 시작한 국가들은 싼 노동력과 원자재를 찾았고 생산품을 소비할 새 시장을 만들려고 뒤쳐진 지역들로 산업을 확장해 갔습니다. 농업국으로 많은 곡물을 생산하는 반면 공업이 아주 낙후되어 있었던 왕정 러시아는 대규모의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였습니다. 러시아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에는 외국자본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전에는 지주와 농민이라는 계급이 있었으나 산업화가 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두 계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노동자는 도시에 살면서 농부들보다는 보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보다 조직적이었으며,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당들이 있어 보다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정치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읽거나 쓰지도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들과 엘리트들이 평등과 공정한 분배와 자유 등의 이상적인 이념을 쫒았고, 그들이 이념을 노동자계급으로 퍼뜨렸습니다.
1904년 12월의 러시아 전역에 걸친 총파업 이후, 1905년 1월 노동자의 해고에 항의하는 파업이 다시 일어났으며 시위대는 겨울궁전 앞에서 황제에게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피의 일요일' 로 불리는 1월 9일, 평화적인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파업은 전국으로 퍼져 총파업으로 번졌습니다. 파업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은 단합이 자신들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러시아 산업구조상 대규모 공장들이 많아 러시아에서는 큰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조직적인 행동이 쉬웠고 순식간에 마을과 주변으로 빠르게 번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1905년에는 총파업이 노동계급에게는 주요 무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파업을 함으로써 조직적이 되고 새로운 계층의 노동계급을 투쟁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1905년 10월의 파업은 '소비에트'라는 조직의 형성을 낳았지만 10월과 12월 파업의 좌절은 처참한 결말을 낳았습니다. 수천 명의 혁명가들이 사형당하고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추방되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혁명이 영영 실패했다고 믿고 자살을 하는 무척 암울한 상황으로 끝났습니다. 1905년에는 마르크스 이념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라는 두 파벌이 있었는데, 몇 안 되는 운동가들을 대표할 뿐 기반이 아주 약했고 노동자계급과의 연대도 약해 거의 전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1917년 2월에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의 황제가 권력을 포기했고 이어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는데, 임시정부의 정책들은 러시아의 경제를 재앙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갔습니다. 산업이 불안정해지고 식량공급이 어려워져 갔습니다. 산업중심 지역의 대다수 기업이 문을 닫았으며 이로 인해 대량의 실직이 뒤따랐습니다. 국민들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러시아의 외국에 대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라는 재정적 부도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917년 9월과 10월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과 연대한 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 두 달 동안에만 백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으며 노동자들이 생산과 공급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지주에 대한 농부들의 반란도 빈번했으며, 군인들도 임시정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7월에는 대규모의 평화적인 시위가 있었는데 무력으로 진압 당하면서 볼셰비키와 노동자들, 군인들이 체포와 구금, 유배당하는 가운데, 볼셰비키의 호소에 대한 응답으로 노동자계급이 항의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8월과 9월에 걸쳐 볼셰비키의 인기는 급격히 상승했으며 수도와 지방을 막론하고 대중들이 볼셰비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라는 조직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10월이 되자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무장반란은 피할 수 없으며 시기는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습니다. 1917년 10월 25일 (11월 7일)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에서 임시정부에 대항해 반란세력을 이끌었습니다. 볼셰비키는 거의 저항없이 주요 정부시설들을 접수해 나갔으며, 25일 밤 9시 45분에 오로라순양함의 공포를 신호로 겨울궁전에 대한 습격을 시작했습니다. 겨울궁전은 새벽 2시에 접수되었습니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로부터 권력을 소비에트가 획득했다고 발표했고, 이 후 70여년 동안의 사회주의 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식적인 혁명일은 겨울궁전을 제외한 다른 정부기관들이 접수되고 혁명이 시작된 전일 날짜로 기록되었습니다.
서유럽이 자본주의에 민주주의의 숙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동안에 러시아는 뒤쳐진 국가로서, 당시의 러시아사람들 중에는 혁명을 통한 국가의 진일보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방법에 있어 볼셰비키는 개별적인 행동보다는 전체적이고 조직적인 전국에 걸친, 전체를 한번에 바꿀 수 있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습니다. 볼셰비키는 혁명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는 진보를, 멘셰비키는 비폭력으로 법률의 개선등을 통한 점차적인 진보를 지향했습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쥐었을 때, 모든 토지는 인민에게 속하고, 공장은 노동자에게 속하고, 또한 1차 세계대전의 참전을 끝낸다는 발표 등으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그 방식에서 잔혹했으므로, 수 많은 부유하고 귀족계급이던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재산이 몰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부들에게서도 절반을 빼앗아 집단농장에 소속을 시켰으므로 열심히 일했던 농부도 모든 것을 뺏기고 매일 보드카만 마시던 농부와 똑 같은 처지가 되었으므로 평등하다는 것이 좋은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고 반발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도시노동자는 일하는 것 뿐 잃을 것도 없었고 보다 교육수준도 높아 사회주의혁명에 필요했지만, 농부는 많든 적든 자신의 땅과 가축 등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계급에 있어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고 농부는 혁명의 흐름에서 소외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혁명 후, 멘셰비키를 비롯, 중도와 우익의 사람들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불법으로 몰수했다고 비방했으나 볼셰비키는 그 해 말 그들을 축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권력강화를 시작했습니다. 이 후 혁명을 따르는 사람들인 Красные (The Reds) 와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인 Белые (The Whites)로 나누어 졌는데, 그들의 세력다툼이 러시아 내전(1917-1922)으로 나타났습니다.
레닌은 볼세비키의 지도자로서 10월 혁명을 이끌었으며 혁명이 성공한 후 1922년에 소비에트연방 (СССР -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을 창설,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공산당을 이끌었습니다. 아직도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고 도시 어디에나 그의 동상을 볼 수 있지만, 지금은 러시아사람들로부터 '조국을 파멸로 이끈자'라는 혹평을 받고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초기단계로서 공산주의의 성공이 최상의 목표였으며 소비에트연방 시절에도 항상 공산주의를 지향해 간다는 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지, 소비에트연방 시절이 공산주의 사회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91년 까지 소비에트연방에서는 10월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이 가장 중요한 기념일이었습니다. 항상 모스크바의 붉은광장과 모든 도시들에서 이날이 되면 공휴일로 군인과 노동자들의 축하퍼레이드가 펼쳐졌습니다. 소비에트연방이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걸쳐 공산당의 마지막 당 총서기 고르바쵸프의 뻬레스뜨로이까로 와해되고 단일 당이었던 공산당이 권력을 잃은 후 부터는 모든 이와 같은 군사행동들이 취소되었습니다. 소비에트연방 시절에는 유치원과 학교에서 이날을 축하하기위한 시와 노래들을 배웠습니다. 기념일이 되면 소비에트혁명을 찬양하는 붉은깃발과 꽃과 슬로건이 적힌 플래카드로 공산당이 영원하기를 기원했으나,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이후에는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진들이 대신했습니다.
옐찐 대통령 때에 경제가 자본주의로 바뀌어 가면서 휴일은 휴일로 남았지만 의미없는 날로서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자연스레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70년 이상 계속돼 오던 기념일을 기념도 할겸, 17세기의 초엽에 러시아가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지금 붉은광장의 바실리성당 앞에 있는 동상에서 볼 수 있는 공작 작위의 귀족과 평민이 함께 손잡고 러시아 각지에 호소해 군사를 모아 외적을 몰아내고 러시아를 지킨 기념일로 11월 4일을 День Народного единства (민중 화합의 날) 이란 이름으로 정해, 국가 공휴일로서 러시아 혁명과는 관계가 없는 휴일이 되었습니다.
'붉은 10월'이라는 이름은 유명한 모스크바의 초컬릿회사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오로라순양함은 뻬쪠르부르크의 항구에 지금도 정박해 있으며, 모스크바 발쇼이극장 길 건너편의 마르크스 상 전면에는 그의 유명한 '인민들이여 단합하라!' 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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