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 사회로 공산주의 이념이 생활 전반에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모델 비지니스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시작된 것은 Хрущёв (흐루쇼프) 시대 였는데, 흐루쇼프 시대의 정책이 공업과 산업 면에서 서방의 수준을 따라 잡고 이를 넘어서자는 것이었으므로, 패션 면에서도 그런 정책이 수립되어 장려되었는데,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서방의 문물이 철의 장막을 넘어 조금씩 들어올 때 외국으로 부터의 패션도 소비에트 연방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알려지고 퍼지고 있었으나, 공산주의 이념 속에서 당의 속박 때문에 창의성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또한, 당시의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모델 직업은 그렇게 달가운 직업이 아니었고 호칭도 모델이 아니라 마네킹이라고 불렸으며, 그 말이 담고있는 의미는 당 고위직의 여자 라거나 하는 놀이개 감으로 여겨졌고 창녀와 같은 인식이 사람들 간에 퍼져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조국에 충성하는 도덕적인 근면한 여성상 보다는 사치에 빠진 여성들이라는 안 좋은 인식이 있었고 정신적, 사상적인 면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주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치부 되었습니다. 당시에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화사한 색상의 옷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사회적인 배경은 '오늘 재즈를 즐기면 내일은 조국을 팔아먹는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상으로 무장된 사회였습니다.
모델들이 있어 옷을 걸치고 패션 쇼에 나가긴 했지만 모델들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리지는 않았으며, 여성들의 의복은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데에 적합한 편리함 위주의 패션이었고 호화로운 차림새는 금지되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직업의 인민은 맡은 직책에서 조국에 충성하는 것이 슬로건이어서, 모델은 아름다움 뿐으로 그 기여하는 정도가 작았으므로 모델의 급여는 건물 청소부 보다도 작았고, 무대에 서는 횟수로 루블을 추가해 받는 실정이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패션 센터는 현재 발쇼이 극장의 뒤에 있었는데, 저녁 시간이면 잘 차려입은 여성들을 주변에서 가끔씩 볼 수 있기도 했고, 급여는 적었지만 패션 쇼를 위해 많은 여행을 다니며 이따금은 외국으로도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 큰 매력이어서 이에 매료된 소수의 여성들이 꿈을 이루려 모델에 지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흐루쇼프가 아름다운 러시아 여성들을 외국에 보여주고 홍보하려는 충동이 강했던 것이 소비에트 연방의 모델들이 외국으로 나가 러시아 의상 무대에 서게 된 결정적인 요인으로, 모델들은 외국으로 나가는 팀에 합류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이 어려웠으며 이념적이고 사상적인 면 및 가족관계 등의 사전 검토를 받고서야 나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공업 쪽으로 발달해 있어 옷, 구두, 화장품 등의 산업은 튼튼함과 실용성이 우선이었지 아름다움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따스함과 편리함이 우선시 되는 실정이었으므로, 모델들이 외국에 나가면 품질 좋고 아름다운 스타킹이나 화장품을 사 오려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모델들을 지키기 위해 엄격하게 야간에는 외출이 금지되었고, 호텔 방문을 밖에서 잠그기도 했으며, 외국인과의 접촉이 금지되었고, KGB 요원이 항시 동행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외국으로 공연을 나갔던 발레단의 발레 댄서들 중에는 도망을 하여 외국의 대사관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하는 경우들도 있었지만, 모델들은 전혀 불가능했을 정도로 감시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뿐 만 아니라 외국에서의 패션 쇼에서도 의복은 사회주의 사상에 맞는 것이어야만 했으므로 초기에는 패션 보다는 모델들에게 더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여러 차례 외국 공연을 다녀 오면서 모델들은 외국에서도 유명해졌고, 외국어를 할 수 있는 모델들도 생겨, 냉전 시대였던 당시에 크레믈린의 최고 무기는 모델인 Регина ЗБарская (레기나 즈바르스까야) 라고 프랑스의 Paris-Match (파리마치) 잡지는 소개 하면서 그녀를 '소비에트연방의 소피아 로렌' 이라고 불렀습니다.
Регина 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사망했는지 등의 의문점들이 있고 그녀의 이력에는 많은 공백이 있어, 화려하고 비참했던 알려진 삶 보다는 숨겨진 부분들도 많습니다. 17살에 단신으로 모스크바에 와서 당시에 유명했던 경제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말한 바에 의하면 부모가 서커스단원이었으나 사고로 은퇴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따로 알려지기는 볼가지역의 KGB 요원으로서 스파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Регина 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아주 드문 경우였으며, 또한 뛰어난 사격솜씨를 갖고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와서는 아주 사교적으로 활동하며 사회 리더급의 자제들이 공부하던 경제학부에서 의도적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한 파티에서 당시에 아주 유명했던 Кузнецкий мост 에 있던 패션하우스의 패션 디자이너 Вера Аралова (비에라 아랄러바)를 만나게 되었는데, 패션하우스에 초대를 받게된 것이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Вера 의 무대에 서게 되었을 때, 다리가 일자가 아니고 오형의 다리여서 다른 모델들이나 주변의 사람들로 부터 모델의 걸음걸이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받기도 했는데, Регина 는 다리를 휘저으며 일직선으로 걷는 자신 만의 워킹 스타일을 만들었고 자신의 약점을 플러스로 만든 이 워킹스타일은 그 이후 모든 모델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Регина 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유명한 모델이 되었지만, 슬라브족의 외모 보다는 올리브색의 피부에 이탈리아인 또는 지중해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외모로 서구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모델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의 유명한 화가였고 가장 장래가 유망되는 젊은이로 모든 소비에트 연방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Лев ЗБарский (례프 즈바르스끼)를 만났는데, 그의 아버지 Борис (바리스)는 레닌의 시체를 방부처리한 것으로 유명한 화학교수 였으므로 그의 가족은 많은 예외를 누리며 소비에트 연방에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Регина 는 그와 결혼을 하여 8년을 같이 살았으며 함께 호화롭고 사치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항상 아름답고 변함없는 여성이 곁에 있어 주기를 원했지만 엄마가 되고 싶어하는 Регина 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을 만들고 싶어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낙태를 하게 되었는데, 더우기 Регина 가 KGB 의 일을 하게 되면서 사이는 점점 소원해져 갔습니다. 남편이 더 젊은 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관계는 더욱 멀어져 갔는데, Регина 는 그동안 최고의 남편에 최고의 보석과 사치품으로 생활을 해오던 대로 여전히 같은 태도로 생활을 했는데, 남편이 떠나고 난 후 주변의 많은 시기하는 사람들이 헐뜯기 시작하면서 점점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을 시도했고, 당시의 법에 따라 정신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친구들의 도움으로 병원을 나와 다시 패션하우스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Регина 와 같은 모델들의 영향으로 이미 수 많은 여성들이 모델이 되고자 지망하여 많은 젊은 신예 모델들이 있었음에도 외국으로 나가는 모델에 Регина 는 빠지지 않고 항상 참여했으며 외국의 요인들과도 아무런 제재없이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두고 Регина 가 KGB 요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당시의 소비에트 연방 보다는 보다 덜 사회주의 이념체계였던 유고슬라비아의 한 저널리스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갑자기 어느 날 그가 사라졌다가 독일에서 그가 쓴 '레기나와의 100일 밤' 이라는 글이 발견되었고 그 글에서 Регина 를 '모스크바의 마타하리' 라고 지적하며 그녀가 KGB 를 위해 일해 왔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Регина 는 주변을 정리하고 모델 직업도 그만 두었으며 교회에 나가면서 조용한 새 삶을 시작했는데, '패션의 여왕'으로 불리던 Регина 가 자신이 몸 담고 있던 패션하우스에서 바닥을 걸레로 닦는 청소를 하면서 생활을 이어 갔습니다. 결국, 51살 되던 해인 1983년 자살했는데, 약물중독이라거나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거나 하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 뿐,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아무도 알지 못하며 Регина 가 평생 간직하고 써온 푸른색의 노트도 영영 사라져 버렸습니다.
Мила Романовская (밀라 로마노프스까야)는 Кузнецкий мост 패션하우스 소속으로, Регина 와 같은 시대에 모델 계의 스타로 활동했으며 블론드형으로, Регина 가 귀족적이고 즉흥적이었던 반면에 Мила 는 열성적이고 인내적인 스타일이었으며, 부드러운 슬라브족 스타일의 외모 였습니다. 밝은 붉은색의 드레스를 패션쇼에 Мила 가 입고 나온 후 그 드레스가 소비에트 연방의 상징적인 패션이 되기도 했는데, 캐나다 몬트리올에서의 패션 쇼 이후 종전의 탱크, 보드카와 연관되던 소비에트 연방의 모델 패션이 푸른 눈의 아름답고 가녀린 러시아 여성 모델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최초로 크레믈린 궁전 내에서 패션 사진을 촬영하기도 해 유명세를 탔으며, 이후 한 화가와 결혼해서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가 영국으로 건너 갔고, 현재는 이혼을 해 영국의 런던에서 두 곳의 부티크를 운영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붉은광장의 소녀' 로 불리는 Галина Миловская (갈리나 밀로프스까야)는 Регина 와 Мила 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대에 Кузнецкий мост 패션하우스에 어린 소녀로 합류했는데, 독특한 외모로 영국의 모델이며 가수인 Twiggy (튀기)와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모델 입니다. 170cm 의 키에 52kg 으로 서구적인 외양을 갖춘 Галина 의 사진을 찍고자 Vogue 잡지는 2년 동안이나 매달렸으며 그 결과,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의 승인을 얻어 붉은광장에서 사진을 찍어 잡지에 올렸는데, 다리를 벌리고 앉아 찍은 사진 때문에 당시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자세로 간주했고 스캔들에 휘말려 패션계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이탈리아의 잡지에 누드 그림이 게재된 후 소비에트 연방의 첫 누드 모델로 기록되기도 했는데,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가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에 정착했고, 은행가와 결혼을 하여 모델일을 접고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 활동했습니다.
Лека Миронова (례까 미로너바)는 소비에트 연방 톱 모델 중의 하나로, 친구가 모델이 되고자 하는 걸 돕다가 Кузнецкий мост 패션하우스에 모델로 선발된 케이스 입니다. 부모가 소비에트 혁명 전에 황제 주변의 고위직이었던 것 때문에 모델 일을 하면서 외국에는 단 한번도 나갈 수 없었던 불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삼촌이 오페라와 발레극장의 지휘자여서 어려서 부터 음악을 접하면서 살았으며,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으나 음악계로 가지 못했고 다리의 병으로 발레의 꿈도 접고 말았습니다. 아주 유명한 디자이너인 Вячеслав Зйцев (뱌체슬라프 자이쩨프)의 메인 모델로 선발되어 활동했고, 지금은 모두 70-80대의 연세이지만 아직도 유명세와 몸매는 여전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오드리햅번' 으로 불려질 정도로 단아한 외모의 모델이었습니다. 한 미국 영화사가 소비에트연방의 3 스타를 선정해 영화를 만들었는데, 발레리나 Майя Плисецкая, 스포츠맨 높이뛰기 선수 Валерий Брумель, 그리고 Лека 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모델 중의 모델 패션쇼에 초청을 받았지만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언론에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의 당 고위직에게 성 상납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고, 그런 사유로 외출도 금지되고 1년이 넘게 집 안에 감금된 적도 있었으며, 어머니의 연금으로 살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그 후, 라트비아의 한 사진가와 사랑에 빠졌으나 당시의 반 소비에트 연방 분위기 때문에 결혼에 이르지는 못 했고, 독신으로 외롭게 외출도 거의 않고 살고 있습니다.
Елена Метёлкина (옐례나 미쬴끼나)는 1970년대 중반에 모델 일을 시작했으며 다른 모델들과 달리 Гум 에 있는 패션하우스에서 시작했는데 긴 다리에 긴 목, 깊은 눈, 큰 선글래스 등으로 주위에서는 독특한 외모로 놀림을 받았지만, 모델계에서는 아주 적합한 체형으로 가는 몸매의 모델의 전형으로 자리 매김 했습니다. 모델 일을 하면서 영화에도 출연했고 영화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는데, 외계인 영화와 같은 픽션 영화에 여러 편 출연 했습니다. 현재는 교회에 다니며 성가대의 일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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