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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며

전설의 발레리나

by Дона 2018. 8. 19.

러시아 발레의 전설 Майя Плисецкая (마야 쁠리세쯔까야)는, USSR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발레의 상징이었으며 발레리나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녀는 1925년 11월 20일 모스크바에 살고있는 유대인의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 그녀의 할아버지는 치과의사로서 모스크바 시내 중심부의 큰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녀의 엄마는 무성영화였지만 아름다운 외모로 여배우로 일했습니다. 아빠는 정부기관의 고위관리였는데 따라서 그녀는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자랐으며 아기 때부터 단역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어려서는 빨강머리 소녀로 아주 활동적이었고 능동적인 성격으로 활발한 여자아이였습니다. 그 때는 스탈린의 시대로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숙청되던 시기였는데, 그녀의 아빠도 시베리아의 북쪽 먼 북극지방으로 유배형식으로, 구속되지는 않았지만 파견되었는데 가족 모두가 따라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편이 없어 배와 기차편 등으로 오랜 시일에 걸쳐 이동해야 했는데, 배의 선장이 유성기를 갖고있어 카르멘 오페라를 틀어주어 여러번 들으면서 그녀의 기억에 깊이 남게되었습니다.


북극지방에서 2년 정도 살다가, 그녀의 아빠가 다시 모스크바로 복귀하여 더 높은 직위를 가지게 됨으로써 그녀의 가족은 더 큰 아파트에서 살게되었고 운전기사가 딸린 자동차도 갖게 되었습니다.

7살 때에 발레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선생님이 예전에 발쇼이극장의 프리마돈나였으나 당시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체계적인 발레 수업과정이 없어 주요 과정은 프랑스어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소련에서 당시의 환경은 유대인들이 배척을 받고 있었고, 그러던 1937년 어느 날 아침에 아빠가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갑자기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발쇼이 극장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발레를 보던 도중에 엄마도 체포가 되었는데, 그래서 그녀는 발쇼이 발레단의 발레리나로 활동하던 이모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모는 여러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대가를 바라는 사람이어서 그녀에게 마음 편한 생활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생활 중에, 아빠는 처형을 당하였지만 오랫동안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엄마는 4년 동안이나 아기였던 아들과 함께 감옥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아역으로 발쇼이 극장의 발레에 단역으로 잠깐씩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발레 무대에 처음 섰다고 할 수 있는건, 1941년 학교 졸업식에서의 발레였습니다. 그 날은, 소련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떠나 우랄지방 등으로 피난을 갔는데, 발레학교의 학생들도 우랄지방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녀는 발레를 그만 둘 수가 없어 우랄지방에서 나와 모스크바로 다시 돌아왔고 모스크바에서 지하 발레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발쇼이 극장의 발레리나로 입단하게 되었으며, 첫 무대에서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뛰어난 발레리나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경쾌한 외모에 비해 아주 침착하고 인내심이 있는 댄서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재능이 있었지만 천직으로 여기지는 않았는데, 평생을 힘든 연습으로 보내야하고 항상 그렇듯이 단역에서부터 모든 과정을 거쳐서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걸 따분하게 여겼습니다.


1948년 Галина Уланова (갈리나 울라노바)가 무대를 떠나면서 지젤 발레에서 그 역할을 하게 되었고 프리마돈나로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1956년에는 발쇼이 발레 무대가 영국에서 열렸고 당시에 소련의 최고 유명한 프리마돈나 발레리나였지만, 그녀는 외국으로 나가는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발레가 영화로도 만들어지면서 Анна Каренина (안나 까레니나), Чайка (갈매기), Лебединое озеро (백조의 호수), болеро (볼레로), Дама с собачкой (개를 데리고있는 부인) 등의 발레가 영화로 기록되었고, 그녀는 이런 발레에서 프리마돈나로 참여를 했습니다.

후에 영화에서 발레리나 역으로 여배우로 활동하기도 했고, 일본과 프랑스에서는 그녀에 대한 도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녀는 발레리나로서 아주 오랜기간동안 65세까지 평생을 발레리나로 활동을 했는데, 몸동작과 눈, 얼굴표정 등의 모든게 중요하지만 특히 손동작에서 예술로 꼽히고 있습니다. 백조의 호수에서의 손동작은 아직 아무도 따라하지 못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1990년 그녀는 모스크바의 발쇼이 극장에서 최후의 발레 무대에 서면서 발레리나로서의 그녀의 삶에 작별을 고했습니다.

최고의 발레리나로서 그녀의 주변에 많은 남자들이 있었는데, 첫 결혼은 1956년에 당시의 가장 유명했던 남자 발레댄서이며 동료였던 Марис Лиепа (마리스 리예빠)와 했는데 3개월 만에 이혼을 했으나 그들은 평생 절친한 친구로 지냈습니다. 1958년에 8살 연하의 유명한 작곡가인 Родион Щедрин (로디온 셰드린)과 결혼을 했는데 그는 많은 발레음악과 오페라를 작곡한 사람이며 그녀는 여생을 그와 함께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녀는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나이들어서는 남편의 도움으로 외국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발레리나에서 은퇴한 후 1990년대에 독일의 뮌헨으로 이주해 살면서 다리와 발의 고통을 치료했습니다.


2015년 5월 2일 89세의 나이로 독일의 뮌헨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했으며 재는 러시아의 전역에 걸쳐 뿌려졌습니다.

그녀는 1959년 Народная артистка СССР (소련 인민예술가) 라는 최고의 영예를 받았고, 1984년에는 Герой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ого труда (소비에트 노동 영웅)이라는 최고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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