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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며

안톤 체호프 박물관 Мелихово (몔리호보)

by Дона 2024. 8. 18.

Антон Чехов (안똔 체호프)는 누구나 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입니다.

그는 1860년 1월에 왕정 러시아 아조프해 인근의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876년에 아버지가 하던 가게가 부도나는 바람에 가족이 도망하다시피 모스크바로 이주해, 그때부터 오랫동안 아주 빈곤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교육을 받았고, 그는 1879년에 모스크바 대학의 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그는 학업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편을 모색하다가 글을 써서 여기 저기에 보내기 시작했는데, 1880년에 처음으로 그가 쓴 글이 한 잡지에 실렸고 이때부터 그의 문학 경력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원고료가 글자 수에 비례해서 지불되었기 때문에 장편을 쓰기보다는 짤막한 단편들로 적은 돈이지만 수시로 받는 게 실질적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글을 계속 쓰면서 엄청난 양의 단편 소설들을 썼고, 당시에는 별로 명예로운 상도 아니었으나 1887년에 푸쉬킨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1890년에는 사할린 섬과 시베리아를 방문해 죄수들이 심한 노동에 내몰리는 것을 보고 실상을 체험하고 하면서 그의 내면에 변화가 일어 그의 작품 세계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장기간에 걸친 장거리 여행 후에 건강이 악화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에는 모스크바 교외에 을 마련하고 안정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1892년 초에 모스크바에서 81km 거리에 있는 영지 매매 광고를 보고서 그는 실제 가서 보지도 않고 13,000루블을 주고 언덕과 작은 강들에 둘러싸인 이 Мелихово (몔리허바) 영지를 샀습니다. 그곳 마을에는 40여 가구의 빈농들이 사는 집들과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그는 이곳 영지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의사인 그는 집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영지를 관리하고 나무와 많은 꽃들을 심고 연못도 만들고 새 건물들도 짓고 야채도 가꾸고 하면서 작품 활동도 활발히 해서 여기에서 살았던 기간이 그의 작품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도 박물관은 그가 좋아했던 모란꽃을 비롯한 꽃들을 잘 가꾸고 있습니다. 그는 마을에 우체국과 3곳의 학교를 열었고 자신이 선생님으로 근무도 했습니다.

 

그는 유리창에 색유리가 있는 연못 근처의 집에 살았는데 그가 지냈던 방에는 좁은 침대와 마을의 목수가 직접 짜만든 나무 옷장이 있습니다.  그의 어린 누이가 가끔 와서 지내던 방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그가 주로 집필하고 환자들을 돌보고 약을 조제하기도 했던 그의 집무실이 가장 크고 밝은 방인데 벽에는 많은 그림과 사진이 걸려 있고 테이블 위에는 작곡가 차이코프스키가 직접 싸인한 사진도 있습니다. 그가 집필에 썼던 만년필과 잉크병도 볼 수 있고 당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가정용품 진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출입문에서 이 건물로 오는 길에 그가 길렀던 개 두 마리의 동상이 있는데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처음 기르기 시작한 닥스훈트 종으로 이름도 당시에 러시아에서 유명했던 안정제와 해열제 약의 이름을 따서 개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자주 오는 친구들과 손님들을 위한 건물도 지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유명한 희곡 갈매기를 저술했고, 그래서 그 건물이 갈매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42편의 작품을 저술했는데 대표작들인 6호 병동, 흑의 수도사, 바냐 아저씨, 미지의 남자 이야기, 농부들, 사할린 섬, 문학 선생, 학생, 3년, 사랑에 대하여 등을 썼습니다.

낮 12시에 벨이 울리면 가족과 함께 점심 식사를 어김 없이 규칙적으로 했다는 그의 일과를 알려주는 종이 아직도 정원에 서 있습니다.  

 

그는 언제든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고 치료했으나 왕정 러시아 정부의 보조나 지원은 전혀 없었는데, 마을에 외래 환자들을 위한 임상 병원을 지어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그 자신이 폐결핵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환자들을 보살피다 40대의 나이에 요절을 했음에도, 사람들은 그에 대해 위대한 러시아의 대문호로만 알 뿐, 그가 의사로 봉사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1897년부터 건강 문제로 인해 이 영지를 팔고 가족 모두가 크림반도의 얄타로 이주했고, 1904년 7월에 사망, 모스크바에 있는 유명인들의 묘지인 노바뎨비치 수도원의 묘지 (Новодевичье кладбище)에 안장되었습니다.

1951년에 여기에 러시아 내에서는 최초로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습니다.

 

정원에 있는 그의 흉상입니다.

마을에 있었던 임상 병원입니다. 콜레라가 번졌을 때 여기에서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지금은 영지 내에 옮겨 지어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님용 숙소 건물입니다. 희곡 갈매기를 여기에서 집필했습니다.

그가 살았던 본관 건물입니다.

점심 식사 시간을 알리던 종입니다.

아버지의 검소한 침실입니다.

누이 동생의 방입니다. 제일 화사하게 꾸며진 방입니다.

하인들의 집입니다.

두 명의 하녀가 지내던 방입니다.

그와 함께한 두 마리의 개 입니다.

후에 건립된 전시관 앞에 있는 그의 동상입니다. 내부에는 연주회, 전람회 등을 위한 공간이 있습니다.

본관 사무실입니다. 고전 양식의 사무용 탁자가 있습니다. 후에 스탈린의 집무실에도 이런 탁자가 있었습니다.

주방 식당입니다. 정오가 되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며 방 구석에 있는 사모바르에 물을 끓여 3잔 이상의 차를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본관 건물의 색유리 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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