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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며

톨스토이 박물관

by Дона 2024. 9. 8.

러시아의 도시 Тула (뚤라)에서 서남쪽으로 14km 정도 가면, 17세기 때부터의 오랜 영지 하나가 나옵니다. 모스크바에서 가는 고속도로와 툴라에서 가는 지방도로 사정도 옛날과는 달리 깨끗하게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며 운전하기에 좋습니다. 이 영지는 Лев Толстой (례프 딸스또이) 가족이 살았던 곳으로 Ясная Поляна (야쓰나야 빨랴나)라고 불립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로, 어느 집에나 그의 책이 한 권쯤은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 왕정 시대에 공작 작위에 있었던 톨스토이의 외고조부가 1763년에 이 지역을 구입하였고, 외할아버지인 Николай Волконский (니깔라이 벌꼰스끼) 공작이 Ясная Поляна (야쓰나야 빨랴나) 영지로 명명했는데, 인근에 햇볕이 잘 드는 계곡이 있어 '밝은 초원'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초원'은 울창한 나무의 숲길을 걷다가 햇살이 비치는 탁 트인 둥근 모양의 평지로 나왔을 때 '여기'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영지는 412 ha(헥타아르. 1ha = 약 3천평)의 면적에 250 ha의 숲과 40 ha의 사과를 비롯한 과일 농장이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고귀한 귀족 집안의 5 자녀 중의 막내로 1828년 9월 9일에 이 영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일이면, 그의 탄생 196 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유산이 자녀들에게 분배되었는데, 그는 19살 때에 이 영지를 상속 받았고, 1856년부터 여기에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영지 내의 본채라고 할 수 있는 3층짜리 목조 주택에서 태어났고, 백작의 작위를 갖고 있었으며, 그의 생애 대부분을 이곳 영지에서 보냈습니다. 당시의 귀족 계층에게는 영예로운 일이어서 그는 군대에 갔고, 그로 인해 영지를 꾸리고 유지 보수를 할 돈이 없어 3층짜리 집 건물만 팔았는데, 이웃이 사서 40km 떨어진 사유지에 옮겨 지었고 20세기 초반까지는 건재했으나 후에 소실되고 말아, 현재는 옛 본채 건물을 볼 수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결혼 전에 여러 계층의 많은 여성들과 교제를 하면서 일일이 일기에 기록을 남겼는데, 혼전에 아들도 하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62년에 Софья Берс (쏘피야 볘르쓰)와 결혼했는데, 결혼 후에는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쏘피야는 어린 나이인 18살에 34살인 톨스토이와 결혼을 했으나, 훌륭하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탓에 좋은 아내로, 엄마로, 안주인으로 영지를 잘 이끌어 나갔습니다. 당시에는 귀족 가정에서 여자 아이들은 9살 때부터, 장래에 결혼하여 가정을 가꿀 교육을 받는 게 보편적이었으므로, 교육을 잘 받은 쏘피야는 어린 나이임에도 많은 하인들을 다스리며 영지를 특출나게 잘 관리했습니다. 그녀는 그림들도 그리고, 화초도 가꾸고, 수예도 하고, 요리책도 쓰고 하면서 지냈고, 톨스토이가 안락하게 지내면서 저술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43살까지 아들 9과 딸 4을 출산했는데 5 자녀는 어려서 죽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당시에 귀족 가정에서 유행하던 개인 가정교사 제도라든지 프랑스 유학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쓸 데 없는 짓이라고 여겼지만, 영지에는 장서가 소장된 도서관과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놀이 기구들이 있었습니다.

 

톨스토이가 워낙 악필이어서 원고를 써도 출판사에서 알아보지를 못해, 원고를 수정해야 할 때마다, 예를 들면 장편 소설인 '전쟁과 평화'를 7번이나 쏘피야가 다시 써서 보내야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곳 영지에서 톨스토이는, Война и мир (전쟁과 평화), Анна Каренина (안나 까례니나), Воскресение (부활), 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 (이반 일리치의 죽음), Казаки (카작인들), Крейцерова соната (끄례이쩨르 소나타), Отец Сергий (쎄르기이 신부), Хаджи-Мурат (하지-무라트), 3권의 자서전인 유년, 소년, 청년시절 등과 수 많은 단편들을 비롯해 보석과 같은 170여권을 저술했고 그의 생애 동안 78편이 출판되었습니다.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 내에서만 1천만 권이 넘는 그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1860년대에는 톨스토이가 농사에 관심을 가져, 사과 등의 과일과 파인애플 농장을 차리고 벌도 치고 온실도 짓고 하면서 자연에 가까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으나, 1867년에 일어난 화재로 농장의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 러시아에서 희귀한 과일이었던 파인애플 재배는 현재까지 이어져, 지금도 파인애플이 영그는 때면 인근의 유치원 아이들을 초대해 파티를 한다고 합니다. 당시의 생활은, 영지 내에서 생산되는 생산물들로 자급 자족이 가능한 정도로 풍족했고, 과일과 꿀은 팔아 수입원이 되었으며, 자체 충당이 불가능한 설탕, 커피와 기름 등은 구입해 썼는데, 요리는 작은 철제 나무 화로와 печка (뻬치까)에서 했습니다. 쏘피야는 백작 부인 신분이었지만 직접 요리하는 걸 좋아했고, 때로는 톨스토이도 자신이 좋아하는 귀리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모스크바에 큰 저택을 구입해서 겨울 동안에는 온 가족이 모스크바에서 지냈지만, 톨스토이는 번잡한 도시 생활을 싫어해 영지에 남아 홀로 지냈는데, 그는 건과일을 비롯한 단 것들을 아주 즐겼습니다. 그는 육체와 정신을 정화해준다고 생각해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했는데, 아내와 아들들은 거부했지만 딸들은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세례도 받았고 러시아 정교회의 종교를 중시했지만, 말년에 교회의 형식적인 절차와 의식들에 회의를 느껴 러시아 정교회와의 관계가 소원해 졌고 그의 냉소적인 표현들로 결국엔 1902년 교회에서 축출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사상이 불교에 가깝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그가 소설가 외에 철학자와 사상가로도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지 내를 걷다보면, 19세기의 상류 귀족 사회의 가족 생활이 무도회 등의 호화로운 생활 만이 아니라 영지의 주인도 열심히 가꾸고 일해야 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산책하고 걷는 것을 즐겨 영지에서 모스크바까지 3번이나 걸어 가면서 주변 사람들이 사는 걸 보고 대화도 나누고 했습니다. 그는 높은 귀족의 신분이었지만, 영지 내에서 일을 할 때에도 단순하고 소박한 옷을 입었고 장거리를 걸어 다닐 때에도 수수한 옷을 입어 사람들이 그를 귀족 신사라고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옷은 아내와 마을의 재단사가 만들어 주는 옷을 입었고, 평범한 흰색 블라우스를 즐겨 입어 그의 사진이나 초상화에도 그런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가끔 승마도 했고, 67세의 나이에 자전거 타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가 이 영지에 와서 살기 시작한 1856년에, 팔아버린 본채 건물 대신에 옆에 있던 다른 건물 하나를 확장해서 거기에서 50년 이상을 살았고, 그 건물이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우랄 산맥 너머의 시베리아 지역의 Томск (톰스크)로 박물관 내의 모든 유물이 피신을 갔었는데, 지금은 박물관에 1910년에 톨스토이가 떠났던 때 그대로 그가 쓰던 유물들과 가구들, 22000여권의 책들이 있습니다. 영지 내에는 그의 묘지, 3곳의 호수, 공원, 목장, 정원이 있습니다. 호수에서는 여름엔 수영도 하고 겨울엔 스케이팅도 했습니다. 영지의 입구에서 건물까지는 1800년에 조성된 "Прешпект" (자작나무 길)이 있습니다. 장편 소설 전쟁과 평화에 이 길이 묘사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톨스토이가 어린 아이였을 때, 12살인 형이 Зелённая палочка (녹색 나무 막대)에 관한 전설을 얘기해 주면서, 숲에서 숨어 있는 녹색 나무 막대를 찾으면 병에 걸리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도 않는다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이곳 영지에서 태어나 54년을 이곳에서 산 톨스토이는 영지 내의 숲에 뭍히기를 소원했습니다. 82살 때의 10월 어느 날, 그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 것도 챙기지 않고 그냥 집을 나서 길을 떠났습니다. 러시아의 늦은 가을인 추운 10월 말, 영지에서 꽤 멀리 떨어진 Астапово (아스따뻐바) 기차역에 내려 선 그는 엄청난 고열과 심한 폐렴으로 그 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묘지는, 그가 원했던 대로 영지 내의 숲속 녹색 나무 막대가 있을지도 모를 특정한 곳에 마련되어 잔디로 덮혔지만 신분에 걸맞는 정교회 장례 의식이나 십자가는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쏘피야는 9년 후에 사망하여 영지에서 2km 떨어진 톨스토이의 부모 묘소가 있는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녹색 나무 막대는 어린 아이들의 장난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잃어버린 낙원이란 상징성도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전설과 구전 동화 등을 단편 소설로 쓰기도 했는데, 그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그의 낙원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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