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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며

마스끄바 끄례믈의 묘소

by Дона 2019. 3. 17.

Москва (모스크바 - 마스끄바)의 중심에 있는 Кремль (크레믈린 - 끄례믈) 성벽은, 최초로 역사에 기록되기로는 12세기 중반에 Юрий Долгорукий (유리 돌가루끼) 공작이 마을을 요새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성곽을 지었고, 13세기에 이르러 Иван Калита (이반) 황제가 나무로 골조를 만들고 바깥 쪽엔 진흙을 발라 견고하게 하고 내부에는 돌을 쌓아 보강하는 방식의 새 성벽을 건설했습니다. 1365년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나무로 된 성벽이 거의 소실되었고, 이에 Дмитрий Донской (드미뜨리) 황제가 흰색의 석회석을 사용해 새로 2km를 더 확장해 성벽을 건설했는데, 그 성벽은 오늘 날의 끄례믈 성벽보다 겨우 200m 짧은 길이였습니다. 1446년에 큰 지진으로 성벽이 큰 손상을 입자 Иван III (이반 3세) 황제가 1485년에 7개의 큰 탑을 비롯해 총 20개의 탑이 있는 성벽을 지었고, 성벽 상부의 높이를 수평으로 일정하게 유지하여 지형에 따라 성벽의 높이가 가장 높은 곳이 19m에 달했습니다. 성벽 상부의 폭은 2m이고, 가장자리에 장식을 겸해 활을 쏠 때 몸을 숨기는 양뿔 달린 왕관 장식들은 600개의 적벽돌로 만들어져 높이가 2~2.5m에 이릅니다.

 

 

 

붉은 광장에서 보이는 Ленин (레닌)의 묘소는,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소비에트 연방의 사람들이 정부에 편지를 써서, 황제 치하에서 인민들을 자유와 평등으로 구해 낸 레닌을 땅에 묻지 말자고 호소함으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 내에서의 좌파와 우파 간의 러시아 내전을 거쳐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을 창설한 레닌이 죽었을 때만 해도 레닌은 우상이며 영웅이었고, 그 후에 세월이 지나면서 드러난 사회주의의 병폐를 겪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묘소는 처음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사면 입방체에 피라미드가 위에 얹혀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에 의한 시신 훼손을 염려해 시베리아 지역의 한 대학으로 옮겨져 보관되었고, 1945년에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왔지만 곰팡이가 약간 슳어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시신을 보존하는 기술도 발전했는데, 시신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내부의 온도, 습도, 피부색, 상태 등을 관찰하고 조절하여 세포들이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연구소가 1939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12명의 과학자들이 방문하여 상태를 점검하고, 6개월에 한 번씩 시신을 화학액에 담가서 전혀 변함이 없도록 보존하고 있으며, 의복도 수 년에 한 번씩 새 옷으로 갈아 입혀 처음엔 제복 비슷한 옷을 입혔지만 현재는 신사복을 입혀놓고 있습니다. 처음엔 30년 보존을 목표로 했는데, 거의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 연구소는, 자국의 Иосиф Сталин (이오시프 스딸린)을 비롯, 공산 베트남의 국가 주석 Hồ Chi Minh (호찌민), 몽골 인민 공화국의 원수 Хорлоогийн Чойбалсан (하를라기인 초이발산), 중화 인민 공화국의 창설자 毛澤東 (마오쩌둥), 북한의 김일성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는 이들 중, 4구의 시신 만이 영구 전시되고 있습니다.

 

 

 

1953년에 Сталин (스탈린)이 죽은 후에 레닌의 묘소에 같이 전시했는데, Никита Хрущёв (니끼따 흐루쇼프)가 집권한 후에 스탈린에 대한 반감으로 시신을 옮겨 끄례믈 궁 밖의 묘지에 묻어 레닌의 묘소에는 다시 레닌의 시신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하에서 인민들의 생활은 예전보다 나아지지 않았고, 황정 시대의 재물과 자원을 소비하며 지탱하던 시절에도 권력자들과 인민의 구별은 뚜렷해 평등이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아름다운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유달리 강한 러시아 사람들이 모국을 파국으로 이끌어 내린 레닌에 대해 반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934년 3월에 레닌 시신에 총을 쏘려는 시도가 있었고, 1959년에는 한 남자가 망치로 관을 내리쳐 유리가 깨지기도 했으며, 1960년 7월에는 한 남자가 울타리를 넘어 관을 걷어 차 유리가 깨지면서 시신의 다리가 심하게 훼손되는 일도 있었고, 1961년 9월에는 한 여성이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유리를 깻는가 하면, 1967년에는 묘소 입구에서 벨트에 찬 폭약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초에 레닌의 관을 방탄 성능이 있는 관으로 교체를 했지만, 현재는 레닌의 시신을 계속 전시하며 보관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심합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시선에서 보는 견해와, 이집트의 미이라처럼 영생을 믿는 것도 아닌데 보관해야 하는가라는 의견에, 공산주의자들의 강경한 보존 주장도 있습니다.

 

 

 

레닌의 묘소에 들어갈 때에는 보안 검사대를 통과하여 들어가며, 카메라, 액체가 담긴 병, 꽃이나 화환 등은 휴대할 수 없고 내부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됩니다.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묘소를 통과하여 나가면 끄례믈 성벽의 외벽 쪽으로 붉은 광장에 면한 묘지 구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묘지 구역은 러시아에서 가장 격이 높은 묘소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일부는 끄례믈의 벽 속에 안장되고 일부는 외벽의 땅에 묻혀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927년에 처음으로 화장장이 열렸는데, 이후로는 주로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화장을 해서 벽에 구멍을 만들어 재를 보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소설가 Максим Горький (막씸 고리끼), 레닌의 여동생인 Мария Ульянова (마리야 울랴노바), 레닌의 아내 Надежда Крупская (나디예즈다 끄룹쓰까야), 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며 현재 붉은 광장 입구에 있는 기마 동상의 인물인 Георгий Жуков (게오르기 주꼬프), 첫 우주 비행사인 Юрий Гагарин (유리 가가린), Спутник-1 (스푸트닉) 우주선과 우주 로켓을 최초로 만든 Сергей Королёв (쎄르게이 까랄료프) 등이 붉은 광장 쪽의 끄례믈 벽 속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또한, 독일의 여성 운동가 Clara Zetkin (클라라 쩨뜨낀), 미국의 저널리스트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인 John Reed 등의 외국인도 있으며, 총 400여 명이 끄례믈의 벽 속에서 영면을 하고 있습니다.

외벽 앞의 땅에는, 스탈린을 비롯해 Леонид Брежнев (례아니드 브례즈녜프), KGB를 창설한 Феликс Дзержинский (펠릭스 졔르쥔스끼),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이었던 Юрий Андропов (유리 안드로뽀프), Константин Черненко (껀스딴띤 체르넨까), 냉전 시대의 냉철한 외상 Михаил Суслов (미하일 수슬로프) 등의 12기의 묘지가 있습니다. 묘지 구역과 붉은 광장과의 사이에는 키 큰 푸른 침엽수를 심어 차분함과 엄숙함을 더해 주고 있는데,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관공서나 기념물 같은 장소에만 푸른 침엽수를 심을 수 있었고 개인의 다차와 같은 곳에 심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문을 닫으므로 입장할 수 없고, 다른 날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입장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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